마을의 기억 위에 세운 새로운 일상, 폐교에서 피어난 커피 향기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은 과거 동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요충지였지만, 교통 인프라의 변화와 산업 구조 개편, 그리고 농촌 고령화로 인해 지역 내 인구는 급속도로 감소했다. 청년층은 도시로 떠났고, 남겨진 어르신들은 점점 더 삶의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상징적 공간이 바로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였다. 한때 이 마을의 아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은 잡초로 뒤덮였고, 교실 안에는 먼지만이 쌓여갔다.
하지만 어느 날, 이 폐교 건물에서 은은한 커피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시니어 카페’가 들어선 것이다. 이 공간은 단순한 커피숍이 아니다. 지역의 고령자가 사회적 주체로 참여하고, 마을 공동체가 다시 엮이는 ‘기억의 장소’이자 ‘미래를 향한 실험실’이다. 단순히 ‘버려진 공간의 재활용’이 아닌,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회복하려는 이 프로젝트는 한국 농촌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본 글에서는 옥계면 시니어 카페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어떠한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정책적·사회적 함의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본다.
공간 재생의 시작 – 기억을 지우지 않고 기능을 더하는 설계
이 시니어 카페 프로젝트는 2019년 강릉시청이 주도한 ‘폐교 활용 사회적 공간 전환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구상은 지역 어르신들이 편하게 모여 차 한 잔을 마시며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단순한 복지 공간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가 논의되었다. 이에 따라 카페 운영이라는 수익 기반 모델이 병합되었고, 이후 강원도사회적경제지원센터, 지역 복지기관, 건축 전문가,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협력하여 본격적인 설계와 리모델링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시된 원칙은 ‘공간의 기억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기능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폐교의 교실은 그대로 유지하되, 한 공간은 바리스타 실습 및 교육장으로, 다른 공간은 실제 매장으로 리모델링했다. 운동장은 야외 테라스와 장터, 야외 커뮤니티 행사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교무실은 회계 및 기획 사무실로 전환됐다. 리모델링 비용은 국비와 시비, 사회공헌 기금 등 다원적 방식으로 조달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설계부터 집기 선택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와 같은 주민 참여 기반 설계는 공간의 정체성을 지키고, 소유감을 높이며, 향후 자발적인 운영 참여를 이끌어내는 핵심 기제가 되었다.
운영 시스템의 구조화 – 어르신이 일꾼이 아닌 ‘운영자’로 서는 모델
강릉 옥계면 시니어 카페의 운영은 단순한 고령자 일자리 창출 사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카페는 사회적협동조합 형식으로 설립되었으며, 운영 구성원 전원이 60세 이상 지역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페에 참여하는 어르신들은 ‘고용된 인력’이 아니라 ‘운영자’로 기능하며, 조합의 이익 구조, 서비스 방향성, 교육 커리큘럼 설계에도 직접 참여한다. 운영 초창기에는 강릉시 평생교육원과 연계한 ‘시니어 바리스타 아카데미’가 개설되어 3개월 동안 커피 추출, 위생 교육, 고객 응대, 회계 관리 등 실무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특히 커피 머신 사용이나 스마트폰 주문 시스템 같은 디지털 기기 교육은 디지털 문해력 향상 프로그램과 연계되어, 고령자의 디지털 격차 해소에도 기여했다. 교육을 마친 어르신은 정기적으로 교대 근무를 하며 하루 평균 6~8명씩 팀을 이뤄 카페를 운영한다. 수익은 일정 비율로 활동 수당과 조합 운영비로 배분되고 있으며, 남는 수익은 마을 발전 기금으로 기부되고 있다. 또한 청년 활동가와 지역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조력자로 투입되어 SNS 홍보, 행사 운영, 키오스크 교육 등을 지원하며 세대 간 협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구조도 강점이다. 특히 고객 응대를 맡은 어르신들은 “내가 이 마을에 쓸모 있는 존재라는 걸 다시 느끼게 됐다”고 말하며, 정신 건강과 자존감 회복 효과도 보고되고 있다.
성공 요인과 정책적 시사점 – 지속 가능성을 위한 조건들
옥계면 시니어 카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공간 재생’과 ‘사람 재생’을 동시에 추구했기 때문이다. 물리적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공간을 주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일은 훨씬 더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옥계면 사례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뤄낸 사례로 평가받는다. 첫째, 정책 설계 단계부터 주민이 참여해 스스로 주인이 되도록 설계된 구조는 자발성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우수한 성과를 냈다. 둘째, 단순한 복지 모델이 아닌 수익 기반을 내포한 구조로 설계되어 외부 지원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생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셋째, 어르신을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한 태도가 결국 지역 전체의 분위기를 바꿨다. 넷째, 이 프로젝트는 노인 일자리, 폐교 활용, 농촌 경제 활성화, 디지털 문해력 교육, 세대 통합이라는 다섯 가지 과제를 동시에 아우르는 통합 모델이라는 점에서, 정책 통합성과 확장 가능성이 높다. 현재 강릉시는 이 모델을 인근 지역에도 확대 적용하고 있으며, 강원도 전체에도 유사한 사업이 기획 중이다. 옥계 시니어 카페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농촌의 위기를 공동체의 힘으로 돌파하는 이 모델은 전국 어디든 적용될 수 있는 탄탄한 실험이자, 희망의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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