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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 활용

폐교와 함께한 귀촌인의 정착기: 공간이 관계를 만들다

공간이 바뀌면 사람도 달라진다

귀촌은 단지 집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삶의 방식과 인간관계, 속도와 가치관을 모두 전환하는 일이다. 그러나 수많은 귀촌 사례가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단순히 생활 환경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자리를 잡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구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바로 ‘폐교’라는 공간을 매개로 귀촌인이 자연스럽게 마을 공동체에 스며든 사례들이다.

 

폐교와 함께한 귀촌인의 정착기

 

버려졌던 교실이 공동 작업장이 되고, 빈 운동장이 커뮤니티 텃밭으로 변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접점이 생기고, 귀촌인의 외로움과 주민의 경계심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이 글은 폐교를 중심으로 마을에 정착한 귀촌인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떻게 공간이 관계를 만들고, 공동체가 재구성되는지를 살펴본다. 농촌이 사람을 품으려면, 먼저 공간이 품어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폐교에서 시작된 ‘함께의 삶’

경북 의성군에 귀촌한 40대 중반의 김 씨 부부는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며 2020년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웃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낯선 이방인, 도시 티가 나는 부부, 마을 경로당에 들어가기 어려운 분위기. 이들 부부는 고립감을 심하게 느꼈지만, 마을 끝에 자리한 폐교를 알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곳은 현재 지역에서 운영 중인 공동 창작공간 겸 공유 주방, 마을 도서관으로 리모델링된 상태였고, 부부는 그 공간에서 목공 수업과 요리 모임에 참여하며 자연스럽게 주민들과 얼굴을 트기 시작했다. 마을회관이 경직된 분위기였다면, 폐교는 상대적으로 중립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에 세대 간, 이주민-토박이 간의 접촉이 쉽게 이뤄졌다. 특히 김 씨 부인은 폐교 내 여성 커뮤니티에서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반찬 나눔 사업을 주도하며 공동체 내 신뢰를 얻었고, 지금은 마을 대표로 활동하며 청년 귀촌인을 위한 안내자 역할도 맡고 있다. 폐교가 귀촌인의 고립을 해소하고, 정착을 가능케 한 사회적 공간으로 기능한 대표적인 사례다.

 

관계 형성과 공동체 재편의 실질적 효과

이 사례가 보여주는 가장 큰 시사점은, 폐교 공간이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관계 형성을 위한 매개 구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폐교는 학교라는 본래의 공공성과 주민들의 기억이 얽힌 장소로, 귀촌인에게는 부담 없이 접근 가능한 열린 공간이었다. 특히 기존 주민과 귀촌인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목공, 가죽공예,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쿠킹 클래스 등을 통해 협업의 경험이 쌓이면서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러한 공통 경험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사회적 유대를 만들어냈고, 마을 회의나 공동 작업장 운영에서도 귀촌인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구조로 발전했다. 나아가 폐교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지역 외부 청년 창작자들도 단기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통해 유입되었고, 지역 공동체의 세대 다양성도 확장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제 김 씨네 부부는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마을 식구”라고 말한다. 귀촌 성공의 핵심은 주거환경이나 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함께 관계 맺고 살아갈 수 있는 열린 공간과 사람들이다.

 

지속 가능한 정착 모델을 위한 조건과 제언

폐교를 중심으로 한 귀촌인의 성공적인 정착 사례는 향후 지역 유입 인구 정책 및 공간 재생 전략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첫째, 폐교와 같은 유휴공간을 단순히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주민과 지역민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커뮤니티 거점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는 공간 배치, 운영 프로그램 구성, 개방성 확보 등에서 차별화된 기획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째, 지자체는 귀촌 초기 단계에 폐교 커뮤니티 공간을 중심으로 한 ‘정착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지역 공동체와의 첫 만남이 긍정적일수록 이주자의 정착률은 높아진다. 셋째, 운영 주체를 공공 또는 외부에만 의존하지 말고, 이주민과 토박이가 함께 참여하는 혼합형 거버넌스 구조를 도입함으로써 자율성과 지속성을 함께 확보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폐교 공간의 지속적 활용을 위한 행정적 기반—교육청과의 장기 사용 협약, 리모델링 허가 절차 간소화, 공공기금 연계 등—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공간은 곧 관계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귀촌인은 단순한 이방인이 아닌 지역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다.